부흥의 여정
김우현 규장 2009. 4. 17 읽고 정리
가장 낮고 비천한 풍경 속에 강림하시는 하나님, 그것은 부흥의 역사에서도 동일한 하늘의 사인이다.
인간 열광의 극치, 진보의 극치의 자리가 아닌 가장 비천한 곳에 성령님은 찾아오셨다. 그곳이 바로 아주사의 베들레헴이다.
인류를 구할 구세주 하나님이 짐승의 먹이통에 오시는 그 거룩함의 코드,
그것이 다시 임하시는 모든 하늘 역사의 진정한 모델이라고.
그렇다면 오늘 부흥이 가능하다면 여전히 하나님은 그런 풍경을 찾아오실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 치밀하며 놀라운 일로 가득하다.
이것을 보는 눈을 주세요. 하나님의 섭리와 일하심을 만지는 축복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갈 것이로다. 롬11:33
아주사 거리 성령운동의 기념물은 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로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새로운 미래에 대한 충격적인 비전을 제시하며 오늘날 세계에서 거의 5억에 달하는 사람들을 강타하한 영적 운동의 태풍이었다.
이 오순절 운동의 불꽃은 강하게 나타나 20세기를 강타한 영적 토네이도가 되었다.
섬세하신 주께서 다 예비하셨을 거야.
하나님은 중심을 정확히 보십니다.
아, 하나님은 그런 준비를 하셨구나.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목표는 감추고 비우고 종이 될 때까지 낮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온 삶을 다 바쳐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진정으로 낮아지고 겸손하며 온유해진 그릇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나타내시었다.
하나님은 이미 있었던 일을 하셨던 일을 후에 다시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 부흥의 중요한 원리이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하나님의 본질을 추구한다고 했지만 그동안 내 능력과 지혜로 이것을 풀어가려고 했던 것이 답답한 막힘의 이유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36:26
순례하는 교회
우리가 진정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면 다른 깊이가 다가와 연결된다.
창조사건이란 없었다는 견해를 수용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창조주에 대한 지식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부흥의 시기 이면에는 강력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령께서 무언가를 깨닫게 하시려고 용기를 주시는구나.
그 나라가 추구하는 진정한 풍경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손해 보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작은 자를 종이 되어 섬기는 것이다.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러 떠나는 것이며
동전 하나를 찾기 위해 온 집을 청소하다가 찾으면 그보다 몇 배나 더 드는 잔치를 여는 것이다.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강조하신 찬국의 코드, 이 골방은 세상의 실용주의적인 추구와 상치된다.
그것은 가장 작고 감추어졌으며 비실용적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 엄청난 천국의 실제가 들어 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천국의 실용주의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충성과 헌신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 의를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의 능력과 나타나심으로 은밀한 중에 드리는 그루터기의 역사 그것이 천국 여행자들이 회복해야 할 땅이요 기업이다.
역시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으셨구나.
역시 하나님의 대응과 전략은 다르구나.
하나님의 사랑 공습. 부흥은 성령님의 임재는 어떤 운사나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의 사랑이 이 땅을 적시는 것이다.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지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시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13:45-46
부흥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품고 겸손히 구하는 열심을 통해서 온다.
우리는 부유하거나 위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가 사랑의 손으로 매일 양식을 주시기에 행복합니다.
하루하루 필요한 것 이상은 조금도 받지 못하고 은행 통장도 없고 수입도 전혀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의지하기에 두려울 것도 잃을 것도 후회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장으로 고통 받는 영혼들의 소리를 들으며 그들을 구하고 섬기는 일이 어떤 것인지 본질적인 통찰력을 가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이 길이 뮬러 로드입니다.
부흥은 참된 경건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부흥을 주신 것이다.
고아들을 위해 이토록 섬세한 기록을 남기고도 장작 자신은 사진 하나 제대로 남기지 않았다.
이것이 부흥이 아니고 무엇인가?
평범한 집회로 시작했던 것이 기도의 태풍으로 변하여 네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4시간이 마치 4분처럼 흘러갔다. 2주 동안 우리는 사도들처럼 그렇게 살았다.
이 짐과 사역은 내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 11:29-30
부흥은 이런 삶을 가능케 한다. 성령이 오시면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게 된다.
싼다야, 네가 얼마나 나를 박해하려느냐? 나는 네가 찾는 길인 예수니라. 너를 구원하러 왔도다.
나의 소유는 무엇이며 나의 교구는 어디인가?
목사님, 무엇을 하시든지 조심하십시요. 지금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시니까요.
부흥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배출하는 통로이다.
하나님 나라를 잉태한 겨자씨들이 뿌려지는 텃밭, 그것이 부흥의 역사다.
그 텃밭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는 겸손한 이들을 통해
그들의 기도와 섬김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리는 현상을 통해 부흥은 이루어진다.
이것은 오늘날도 여전하다.
부흥에는 그렇게 측량 못할 하나님의 전략이 깃들어 있다.
형제여 신앙이라는 미명 아래 모든 것이 우리의 힘으로 이뤄지고 있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것은 내 육신의 행복을 위함은 아니었던가?
무의식중에 그러나 실제로 그대 영혼이 기뻐한 것은 역시 그대 자신과 그대의 인위적인 거룩을 두고서가 아니었던가?
절대적인 겸손, 즉 자기를 전적으로 버렸던 그리스도의 겸손을 우리의 겸손으로 가지는 것만이
우리가 원하는 정결한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우리는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엔드류 머레이)
진정 그리스도의 겸손은 이제 만나기 어렵다. 그 열광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란 힘들다.
주께서 가신 길, 그 십자가와 보혈의 영광의 길. 결국 그것을 닮는 십자가의 헌신이 부흥의 길이다.
하나님 나라는 얼마나 가슴 벅차고 아름다운가?
교회의 모든 지체들은 저마다 책임과 기능이 있고 가장 중대한 의미에서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제체들이 대단해 보이는 지체들과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각자는 가장 절실한 긴박감을 가지고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지체들이 중요하다.
만일 성령께서 너희 삶에 임하시면 작고 연약한 너희가 곧 하나님 나라의 지체요 주역들이다.
성령세례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1:4-5
부흥이란 다시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인치시는 성령의 내주하심이 아니라 다시 능력을 회복하고 강한 군사로 살기 위해 임하시는 능력인 것이다.
사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신학 교육를 받지 않은 성경학교 출신이었다.
그중 가장 많은 선교사를 배출한 학원은 무디성경학교였다.
부흥이란 개인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입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진정한 회복과 변화는 없다. 그것을 열망하고 구해야 함을 전해야 한다.
당신은 성령께 예배드리는가?
사실 교회는 이 땅에서 33년 동안 살고 가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지만
2천년 동안이나 우리와 함께 계신 성령님에 대해서는 그만큼 알지 못한다.
성령이 원하시는 것은 피상적인 굴복이 아니었다.
성령은 내가 동의하기 전에 아무 것도 위하실 수가 없었다.
마침내 내가 구분이 내 안에 오시기를 동의하는 순간 불사름 사건이 일어났다.
이제 나의 시대는 끝났다. 성령께서 통제권을 완전히 장악하신 것이다.
너무나 평범한 질그릇 같은 한 영혼이 성령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위대한 영혼이 되었다.
여기에 부흥의 원리가 들어있다.
부흥은 내가 나의 몸들, 성전들에게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그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세례의 비밀이다.
내가, 이 남루하고 누추한 내가 그렇게 소중하구나.
성령께서 얼마나 나를 통해 일하고 싶어 하셨을까?
그러나 나는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내 멋대로 살아온 것이다.
성령님, 용서해 주세요. 성령님을 제가 알지 못했습니다.
그 사랑, 그 역사를 알지 못한 무지를 용서해 주세요.
나는 다시 내가 의도하지 않은 용서를 고백하고 있었다.
아직도 무지하고 여전한 의구심이 있지만 가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길과 그 진정성, 성령님이 뜨겁게 일하신 그 현장에 가서 보고 저를 부르신 이유를 만날 때까지 가고 또 가겠습니다.
그렇게 부흥을 향한 나의 여정은 아무도 모르게 출발되었다.
무언가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만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두려움은 부재하다.
이 무디고 돌 같은 마음이 성령으로 풀어져야 한다. 그것이 부흥이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가 아시느니라” 마6:8
모든 것을 다 팔아서 하늘의 부르심을, 그 본질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품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여주실 것이다.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진실이라는 의미를 담고 충성해야 한다.
희생의 피 값을 되찾는 하늘의 프로젝트였다.
영국을 떠날 때---처음 쓰는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달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이상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겠습니다. -로버트 토마스-
악한 세력들이 부흥의 본질을 깨닫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1866년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하면서 성경들을 전해주었는데
그 성경을 받은 사람들 중 하나가 그를 죽였던 박춘권, 그리고 박춘권의 조카였던 이영태입니다.
이 이영태라는 사람이 그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어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레이놀즈 선교사의 조사(전도사)가 되어 성경의 2/3를 번역할 때 큰 기여를 합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하기 전 최치양이라는 아이에게도 성경을 3권 주었는데
금서인 성경을 가지고 있던 최치량이 겁이 나니까
이것을 평양 감영 경비였던 박영식(그는 성경을 수거하는 책임을 맡았다)에게 건네준 겁니다.
이 박영식이 성경 3권을 가져가 자기 집에 도배를 합니다.
그러니 그 어디를 봐도 하나님 말씀이다보니 말씀과 만남이 그 현장에서 이루어진 것이지요.
결국 박영식이 성경을 도배했던 그 집이 이후에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교회가 된 것이지요.
그 널다리 교회가 장대재 교회가 되었고 후에 장대현 교회가 된 것이지요.
그러니 토마스의 죽음과 평양 대부흥은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이지요.
부흥은 수많은 밀알들의 수고와 희생을 통해 열매 맺는다.
그 밀알들과 그들이 뜨겁고 고독한 여정에 동참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이야기를 그 신비를 더욱 알아보리라.
부흥은 하늘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능력과 감동을 주심은 그리스도의 충만하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갖게 하심이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슥4:10
기름부음 받은 그 때 왕으로 다스리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깨어지는 학교에 들어가는 입학 허가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 깨뜨림이 상한 심령이다.
강한 심령은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향해 애통하며 처절히 자신을 깨뜨린 가난한 마음이다.
다윗의 노래에는 대부분 눈물과 상한 심령의 토로가 있다.
그는 기름부음 받았지만 광야의 맨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해산의 수고를 하고 있었다.
진정한 낮아짐, 자기 비움, 겸손이 그 안에서 태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완전히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눈으로 볼 때 그는 깨어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시작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더 좋은 날이 이 조선 땅 위에 곧 다가오기를 소망하자.(귀출라프)
애통의 코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창4:7
보혈과 십자가의 약속을 나누며 뜨겁게 기도했다.
진정으로 어린 양을 닮으려는 헌신과 깨어짐에 비들기 같은 성령님이 임하신다.
아버지 품으로 나아오기 위해서 어린 양의 피흘림과 상한 심령, 애통이 있어야 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드려진 순교야말로 가장 귀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어린 양을 본받아 드린 그 희생은 언약 안에서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성막 바깥뜰을 지나 성소에 다다른다.
그러나 성소에서 지성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감사보다 더한 것이 요구된다.
지성소는 희생을 요구한다. 그 희생은 우리가 땀흘려 드리는 열심이 아니다.
어떤 희생의 제사가 우리를 지성소에 이르게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깨어진 마음, 상한 심령이라는 희생이다.
“그는 육체로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서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5:7
하나님의 작전은 매우 흥미롭고 예측불허다.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1:8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46:10
부흥은 이 비워지고 가난하며 아프도록 자신을 회개하는 상한 심령을 통하여 온다. 그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이 약속을 붙들고 오직 하나님만 갈망하는 영혼들에게 성령께서 친히 찾아오시는 것이다.
혼돈과 공허, 흑암의 깊음 속에서 간절히 하나님을 구하는 몸부림,
그것이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상한 심령이요 그분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통로다.
진리와 지식을 추구한다는 미명의 알량한 추구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깊이에 도달할 수가 없다.
상한 마음, 깨어짐과 낮아짐의 순종으로 하늘의 뜻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닮아 살게 하시기 위하여
성령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어떤 존재일지라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하시며
우리와 더불어 그 나라를 꿈꾸고 열매 맺기 원하시는 성령 하나님,
그 사랑 앞에 내 모습 그대로 겸허히 비우고 순종하는 것이 부흥입니다.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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