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일상

거룩케 됨 (나실인이 됨")

백미란목사 2009. 10. 4. 10:39
거룩케 됨-나실인이 됨"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모두 나실인들이 되기를 갈망하신다. 나실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전폭적으로 거룩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거룩케 되는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위하지 않는 것이다.
더러움을 처리하는 부분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이 깨끗케 되고 의롭게 되고 신실하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순결성을 알아보는 시험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우리의 생각과 뜻과 감정과 육신의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막 12:30).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첫사랑이시며 유일한 사랑이신 그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다른 어떤 사람도 갖기를 원치 않으신다. 설령 우리가 이렇게 그분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위하여 절대적이고 전폭적이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절대적이지 않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는 예로 결혼 생활을 들 수 있다. 하나님은 참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를 당신에게 허락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향하여 완전히 순결하다 할지라도 그녀는 당신을 위하여 철저하고 절대적이고 전폭적이 아닐 수 있다. 가장 사랑스러운 아내라 할지라도 어떤 일에 있어서는 여전히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 어느 정도 있다.
나실인의 문제는 우리의 절대성을 시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실인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고 철저하고 전폭적이 되어야 한다.

A. 인성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주 예수님을 의미함

예표론에 따르면, 인류 가운데 유일한 나실인은 주 예수님이다. 그러므로 나실인은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나실인은 인성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사신 주 예수님을 의미한다.

B. 특별한 서원을 함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분별함

민수기 6장 2절은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나실인이 특별한 서원을 함으로써 거룩케 됨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분별하는 사람임을 본다. 많은 때 우리는 주님께 서원을 하지만 그렇게 강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은 서원을 하며 그것을 지킬 수 없을 경우가 많다. 당신은 서원하여 당신의 일생 동안 그것을 신실하게 지킬 수 있는가?

1. 자신을 하나님께 분별하고 거룩케 하는 것은 모든 더러움들을
처리한 후에 따르는 것임
분별함과 거룩케 됨에는 차이가 있다. 분별함은 소극적인 측면이며 거룩케 됨은 적극적인 측면이다. 소극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세상적인 사람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별하며, 적극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거룩케 한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 먼저 우리는 분별된 다음에 거룩케 된다.
하나님께 자신을 분별하고 거룩케 하는 것은 모든 더러움들을 처리한 다음이라야 한다(5장). 이것이 논리적인 것은 더러움의 처리가 나실인의 서원 앞에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 제사장들은 출생에 의해 제사장이 됨
출생으로 인하여 되는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시작하심으로부터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인 사람인 나실인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른 것이다. 한 사람이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시작하심에 의한 문제이다. 즉 그것은 그 사람이 행한 것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 대하여 하신 것에 따른 것이다.

3. 나실인은 서원함으로써 됨
서원함으로써 되는 나실인은 자신의 시작으로부터 자신에 의해 하나님께 분별된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출생에 의해 나실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서원을 함으로써 자신을 나실인이 되게 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시작으로부터 그분에 의해 정해진 사람들이나 나실인들은 그들 자신의 시작으로부터 서원함으로써 나실인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서 하나님의 시작하심과 또한 우리의 시작으로부터 있다. 둘 다가 필요하다.

4.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임명을 보충하는
사람의 동역이 요구됨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임명을 보충하기 위한 사람의 동역이 요구된다. 이것은 사무엘의 경우로 예시된다. 사무엘은 하나님에 의해 임명된 제사장인 엘리 제사장의 부족을 보충했던 한 나실인이었다.
엘리는 나이에 있어서 어떤 부족함을 가졌다. 그러나 자신의 시작으로부터 나온 사무엘이 엘리의 부족함으로 인한 공백을 채우기 위해 들어 옴으로 엘리의 부족함을 보충했다.

C. 포도주와 그 근원과 관련된 것을 멀리함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 라도 먹지 말지며』(3-4절).
여기서 우리는 나실인이 포도주와 그 근원과 관련된 것들을 멀리 해야 했음을 본다. 이것은 땅에 속한 누림과 즐거움을 멀리 해야 함을 의미한다(시 104:15, 전 10:19 참조). 모든 종류의 포도주를 멀리 하는 것은 모든 종류의 땅에 속한 누림과 즐거움을 멀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즐겁게 하는 땅에 속한 것에 주의해야 한다. 땅에 속한 즐거움은 정욕적인 행위와 정욕적인 의도로 이끈다. 땅에 속한 누림과 즐거움은 나실인을 더럽힌다.
나실인은 포도주로 만든 식초와 포도주의 즙과 새 포도나 건포도를 멀리해야 했다. 이것은 땅에 속한 누림이나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을 멀리함을 의미한다. 식초는 포도주로 분류되는데 이는 그 근원이 같기 때문이다. 포도주와 식초와 포도즙은 모두 금지된다. 우리는 이것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인 사람은 땅에 속한 즐거움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절대적으로 분별됨을 본다. 이것은 나실인의 절대성을 보여 준다.

D. 머리를 밀지 않음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민 6:5). 머리를 밀지 않는 것은 주님의 머리 되심을 거스리지 않는 것이다(고전 11:3, 6 참조).
나실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에 주의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땅에 속한 즐거움과 전혀 관계를 갖지 말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절대적으로 권위 아래 곧 머리 되심 아래 머물러 있어야 한다.
사람의 머리를 미는 것은 주님의 머리 되심을 거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머리를 민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위의 주님의 권위를 벗어 던져버림을 의미한다. 나실인은 머리를 길게(자유롭게) 길러야 했다. 즉 그는 주님의 머리 되심 아래 복종하는 가운데 머물러야 했다. 주님의 머리 되심 안에 능력이 있다(삿 16:17).
오늘날은 무법천지이다. 만일 경찰을 없애고 법정을 닫는다면, 사회는 도둑들과 살인자들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는 살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은 뛰어난 헌법을 갖고 있으며, 이 헌법을 기초로한 강력한 법률들과 이 법률들을 수행하는 많은 법정들이 있다. 법정에 들어서는 모든 사람은 미국 정부의 법에 복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 전체가 파괴될 것이다.
타락한 인류는 거스리는 인류이다. 거스리는 본성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 그러므로 대리 권위가 없는 상황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 정부를 세우신 까닭이다(창 9:5-6). 모든 정부는 하나님의 권위를 대표하는 대리 권위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롬 13:1-2上)라고 말한다. 교사들과 고용주들과 경찰관들은 대리 권위들이다. 이 땅 위의 어느 곳이든 대리 권위가 있다.
이 대리 권위의 문제를 교회에 적용해 보자. 교회 안에 대리 권위가 있는가? 만일 교회 안에 대리 권위가 없다면, 왜 장로들이 있겠는가? 최근에 어떤 이들은 신약 안에는 대리 권위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한 주장이 참되다면 왜 신약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 장로들이 있다고 말하는가? 물론 그리스도는 머리이시며 권위는 그 영이시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여전히 장로들을 필요로 한다. 장로들이 없다면 교회는 무정부 상태가 될 것이다.
우리의 가정 생활에도 대리 권위가 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대리 권위이며(엡 6:1) 남편은 아내에게 대리 권위이다(엡 5:23). 바울은 심지어 아내는 남편을 경외해야 한다고 말한다(엡 5:33). 아내가 남편을 경외한다는 것은 아내가 남편을 대리 권위로 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조그마한 가족에게도 대리 권위가 있는데 하물며 교회 안에 대리 권위가 얼마나 더 있어야 하겠는가?
나실인에게는 두 가지의 특성 혹은 표적이 있는데, 첫째로 나실인은 세상적인 즐거움을 접촉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둘째로는 항상 자신을 어떤 권위 아래 두는 것이다. 이것들은 엄숙한 문제들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땅에 속한 즐거움을 멀리 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의 머리를 밀지 말아야 한다. 즉 우리는 권위를 존경해야 하며 모든 방면에서 우리 주님의 머리되심 아래 머물러 있어야 한다.
 
본문

헤브라이어로 ‘성별한다’는 뜻이다. 나실인이 되는 것은 스스로 서원하거나 출생하면서부터 또는 부모가 서원하는 것 등이 있다. 구약성서사사기》 13장에도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고 하여 삼손이 나실인이 될 것을 설명하였다. 사무엘서 1장에는 한나가 그 아들 사무엘을 나실인으로 드리겠다는 내용이 있다.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실인으로서 서약한 사람은 지켜야 할 사항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 몸을 구별할 것과 포도나무 소산 및 독주를 금할 것과 머리를 깎지 말 것, 시체를 가까이 하여 몸을 더럽히지 말고,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할 것을 규정하였다. 나실인의 서원은 30일간, 60일간, 100일간이 있고, 7년간을 서원하였다가 20년간을 지낸 경우도 있다. 평생을 나실인으로 지낸 사람도 있다. 구약의 삼손이나 신약의 세례 요한의 경우이다.

성서에는 언급이 없지만 유대교의 《미슈나》에 따르면 아내나 노예에게도 나실인으로서 서약시킨 경우가 있었다. 삼손의 어머니가 나실인이었으며, 헬레나 여왕은 21년간을 나실인으로 지냈다. 나실인이 그 몸을 더럽혔을 때는 정결케 하는 의식이 있었다. 《민수기》 6장 9~11절에 “누가 홀연히 그 곁에서 죽어서 스스로 구별한 자의 머리를 더럽히거든 그 몸을 정결케 하는 날에 머리를 밀 것이나 곧 제칠일에 밀 것이며 제팔일에 산비둘기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회막문에 와서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라고 하여 정결케 하는 내용이 나온다.

또 자기 몸을 성별하는 날을 새로 정하기도 했다.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야훼)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1년 된 수양을 가져다가 속건제로 드렸다. 신약성서에서 바울로도 머리를 깎고 서원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사도행전 18:18)”고 나타나 있다.